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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90살~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라는 공간에 내던져졌다.


우주속의 지구라는 공간안에, 누군가는 아시아 지역에, 누군가는 서유럽지역에, 누군가는 남아메리카 지역에.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고, 그것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것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유전자가 이어지고 이어져 내가 되고 우리가 되어버렸다. 마치 바톤 터치 하듯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해졌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삶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이자 개척자인 셈이다. 적어도 아직까지 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자신이 삶의 프로라고 떠들어 대는 이들이 다양한 이론을 펼쳐대기 시작했고, 그 중 몇몇은 인정을 받아


다른 사람들도 따라 살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정설인양 공론화 시키면서




지금 이 순간에 사람들이 동의한 삶의 프로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뛰어난 지적능력과 이기심이 섞인 개인주의적/기회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아기

2. 학교 입학 후 사회적으로 뒤쳐지거나 너무 독특하지 않은, 사람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사회성을 유지하는 학생

3. 학교내에서 성적 우수로 분류됨과 동시에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학생

4. SKY 입학한 학생, 최소 서울에 있는 이름 높은 학교에 입학한 학생

5. 대학생으로서 성적 우수 장학금을 놓치지 않음

6. 대학생으로 클럽 등 노는 문화에 뒤쳐지지 않으며, 패션에 민감하고,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사회성 유지

7. 대기업 입사 후 회사의 핵심인물이 되어야 함

8. 결혼은 연애결혼 이어야 하며, 배우자는 지적/성격적/인격적으로 문제 없어야 함

9. 30대 중.후반 부터는 안정된 삶을 가져야 한다(직장, 돈 등의 문제 없음)

10. 퇴직할 때까지 문제 없이 돈을 벌 수 있어야 하며, 후배에게 뒤쳐지지 않아야 한다.

11. 퇴직 후에는 돈 걱정이 없어야 한다(미리 노후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

12. 이후에는 등산을 다니게되는데 브랜드 있는 등산복 세트를 입고 다닐 수 있는 재력이 있어야 한다.

13. 노년에는 여유롭고 너그러운 하는일 없는 할아버지/할머니여야 한다.

14. 임종의 순간에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족들의 눈물을 받으며 죽어야 한다.




이 것은 총 3단계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준비 단계(0세~30세) : 향후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 공부를 하고 미래에 도움이 되는 취미생활을 가져야 한다

                      (게임이나 PC방 등을 이용해서는 안되며, 그림이나 음악, 운동은 재능이 있는 한에서만 해야 함)

활동 단계(30세~60세) : 본격적으로 돈을 버는 시기로, 타인에 비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야 하면 동시에 안정적이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에서 일을 해야 하며, 옷이나 집, 차 등 남에 뒤지지 않게 구색을 갖춰야 함)

마무리 단계(60세~) : 퇴직 후 죽을 때까지는 노는 시기로 등산 등의 활동을 해야 하고, 존경받고 너그러운 모습이어야 한다

                     (단, 출퇴근 시간에는 전철/버스는 이용하면 안되고, 욕심이 없어야 하는 등 젊은이에게 방해가 되면 안됨)



수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길을 개척해 갔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앞 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며 개척된 길을 다지면서 생성된 길이다.

이 길은 안전하고 편한 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며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산에서 등산로를 이탈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앞 사람의 발자취를 밟지 않는 것은 마치 지뢰지대를 지나는 것 처럼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이 것이 삶을 잘 사는 사람의 모습이며, 엄마 친구 아들/딸의 모습이다.






실제로 이 길을 이탈하면 더욱 위험할까? 앞사람의 발 자취를 조금이라도 틀리게 밟으면 지뢰가 터지는가?

당연히 위험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우리는 다양한 위협을 받으며서 살아간다. 이 길을 계속 가든 길을 이탈하든 위협은 똑같이 존재한다.

다만 개척된 이 길은 이미 선례가 있기 때문에 위협이 어느정도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 위험해 보인다.


그렇다면 정도(正道)를 벗어나면 얼마나 위험한가? 아니 이 길이 정도가 맞나?

신기한 점은 우리가 눈을 조금만 돌려봐도 다른길을 걷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그러면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왜 그러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돈이 많아서? 용기가 많아서? 가진 재능이 특이해서?


아니다,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는 단 한가지다.


'목적'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삶의 목적(목표)가 없었다.

위협은 그 정도 였던 것이다. 목적이 있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다른길을 걸었을 때의 위협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그렇지 않고 정도라고 불리어지는 길을 걷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없었다. 하고싶은것도 되고싶은 것도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든걸 망각했고 그저 먹고사는 생존에만 몰두했다. 사람들은 안전빵이라는 빵만 먹었으며 그 빵은 두려움이라는 피하지방층만 생성해 내었던 것이다. 너무 두꺼운 지방층 때문에 뱀에게 물려도 자신이 중독된지 모르고 뱀을 먹는 돼지처럼, 그러다 결국 독 때문에 죽는 돼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흡사 좀비와도 같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은 흐릿한 눈과 구더기가 세 들어 사는 아파트가 되어버린 뇌를 가진 좀비, 오로지 생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최선의 경로를 찾는 효율성과 그 효율성을 위해 내가 가진 자원과 외부자원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것만이 인생유일의 목적인 것처럼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회구조마저도 위의 길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플랜 A가 우선하고 플랜 B는 권장사항이 아니다. 최근에는 많은 지원이 생겨서 창업지원단이나 고용지원센터등이 있지만 고용센터는 사실상 매우 미약하다. 이것이 정도를 걷는 사람들의 핑계가 될 정도로


그래서 사회구조적으로 볼 때 우리는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 실수해서도 안되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 주어진대로 밟아 나아가야 하며,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두번의 기회는 없고 멈칫하는 순간 우리는 그대로 멈춰버리고 어디엔가 끼여버린 것처럼 되어 내 후배들이 꾸역꾸역 밀고 올라가는 것을 보게된다. 동시에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공포고 그래서 두렵다. 어떻게든 도태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는다.

왜 이렇게 된걸까?

언제부터 나는 이런 정도(正道)의 조류속에 담겨져 있었을까? 그저 어느날 눈떠보니 지구라는 행성의 아시아의 한국의 나라는 사람으로 눈 떴을 뿐인데, 왜이렇게 숨이 막히고 앞이 막막하고 눈물이 나려하는걸 억지로 참아가며 힘들어 해야 하는건가


하지만 이럴수록 우리는 침착해져야 한다. 부들거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고 뒤집어 지려는 눈에 힘들 주고 까드득까드득 거리는 이를 앙 다물고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보고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서 점점 시야를 멀리 두려고 해야 한다. 마치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된 것처럼


그러다 결국 알게된다. 나는 인생을 30년만 살고 있었고, 그래서 현미경이라는 이름의 안경을 쓰고 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리곤 결국 깨닫게 된다. 인생은 30/30/30년의 조합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 통짜의 인생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사건/사고와 사연들과 실패/실수와 즐거움/기쁨과 다양한 목적/목표들이 뒤섞여 있다.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앞선 발자취를 밟아나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30년 이라는 나만의 한계점을 그어두고 30살까지는 공부를 끝내야 하고 그 이후에는 대학교에 갈수 없는 것처럼 나를 옥죄었고, 60살까지는 대기업에 취직하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결혼을 해야한다고 나를 옥죄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쓸모한 존재가 되어버릴 거라고 나를 내몰았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이다. 인생은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질래야 가질 수도 없는 것이고, 인생이란건 그리 단순한게 아니다.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해보고 실패하고 다른 것을 해보고, 또 실패하고 그러다 운 좋게 얻어걸릴 수도 있는 것이고 평생 타인의 기준에 맞는 성공이란걸 한번도 못해볼 수도 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기준에 얽매일 필요도 없이 그냥 나라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누구의 아들, 어느 대학의 누구, 어떤 회사의 대리, 스포츠카를 가진 나가 아닌 그냥 이 땅위에 두발 딛고 서 있는 나를 느끼고 걸쳐진 것 아무 것도 없는 나체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나를 나로서 볼 수 있다면 인생은 더이상 30/30/30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실험터,놀이터,쉼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과 다시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부모/세상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맺은 불공정 계약이었다면 이제는 내 입맛에 맞는 협상을 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에게 '이건 이렇게 해야돼' 라고 말할때마다 나는 '잠깐 기다려'라는 대답을 하면서 내 식대로 세상을 만들어 가면된다. 이제 더이상 세상의 규칙들, 도덕적 규범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옳은 것이며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그런 세계가 만들어진다. 다만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몇몇 부분에서는 더 심도있는 협상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사람을 때릴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렇게 협상을 하면서 나만의 법칙을 몇가지 세우면 나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말 것',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해봤자 머리만 아프다', '다양한 관점에서 사건을 봐야한다 최소한 반대입장이라도 생각하자', '때때로 나쁜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해야할 필요가 있다' 등등 나에게 맞는 법칙들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이런 법칙들을 세우고 살아도 문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의할 것은 소설속에 나오는 존재가 되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고 어디까지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타인들로부터 칭찬받는 존재가 되어야 선한 사람은 아닌 것이고, 사회적인 기준에서 이기적으로 보이더라도 내가 옳다고 판단했다면 그것을 옳은 것이며, 때로는 냉정하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끓어오르는 화/분노/질투심에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식욕과 성욕에 불타오를때도 있을 것이며, 솟구치는 의협심으로 누군가를 구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대신 화를 내고 대신 싸울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이며, 나와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인생은 타인이 간섭할 수 없는 나의 영역이며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똑같은 지구의 한귀퉁이에서 살고 있지만 헬조선의 현실을 한탄하고 자신의 환경을 탓하며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타인과의 비교속에서 행여나 뒤쳐질까 두려움에 떨고 괜찮은척 자존심을 세우며 사는 것보다는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작은 노천카페에서 누군가와 함께 평화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듯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살 충분한 가치가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